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신석기시대 제주도, 농경의 흔적은 없었다

이성돈 sdlee3000@korea.kr      승인 2019.05.30 09:10:00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5) 선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앞서 살펴본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이동생활을 하면서 무리를 지어 살며 소수의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무리는 몇몇의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자주 이동하면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는 이 같은 소집단이 생활해 가기에 알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 씨족이라는 더 큰 사회 집단을 이루고 생활하게 되었다. 씨족이란 핏줄이 같은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그런데 생산 경제 단계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이때는 아직 생산력이 보잘 것 없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토지도 공동으로 소유하고, 다 같이 일하여 다 같이 나누어 먹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씨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씨족 회의에서 의논하여 처리하였다. 이처럼 씨족 사회에서는 빈부의 차가 없이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씨족의 우두머리인 씨족장은 씨족 회의에서 선출되었는데, 권력이 강하지 못했고 씨족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에 불과하였으며 이동생활로 인한 사회를 형성 하지는 못하였다.

인류가 사회를 형성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정착생활이다. 농업적 관점에서 신석기 시대에 기대되는 것은 정착생활로 농경과 가축 사육의 시작이다. 이 시기의 석기는 초기에 뗀석기가 소형화하면서 사용되다가 간석기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시베리아 지역 도처에 거주했던 종족이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주민들은 주로 물과 식량 자원이 풍부한 해안가 언덕·큰 강가에 인접한 대지·인근 도서 지방 등에 자리 잡고 생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성돈1.png
▲ 고산리 신석기 유적지 전경. 사진 제공 =이성돈.

약 1만년전에 등장한 한국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는 제주에서 발견되었다. 제주도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고산리 유적의 발견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빙하기에는 제주는 한국, 중국, 일본 큐슈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었으나 약 1만 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섬으로 분리되는 시기이다. 제주지역에서는 제주시 고산리, 오등동, 김녕리, 서귀포시 강정동 등지에 후기 구석기 전통을 지닌 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유적에는 간도끼, 갈동과 갈판, 숫돌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새로운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유적을 통하여 제주의 선주민을 살펴보면 제주인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선주민은 신석기인 이후로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때는 제주도가 섬이 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집단 대량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이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인류의 이동이나 역사의 징후 등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도 몇 차례의 이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섬이 되는 시기는 빙하 시대가 끝나는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현재의 대륙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붙어 있던 제주도가 섬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는 또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 시대가 열릴 무렵 이었을 것이다.

무제-6.png
▲ 고산 신석기 유적지(왼쪽), 고산리에서 발굴된 유적들(오른쪽)

이 시기는 제주도에서는 제주 고산리 유적이 형성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고산리에 거주했던 신석기 집단은 섬이 된 뒤에도 계속 눌러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 고산리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87년이었는데, 그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형석기 5천여 점, 융기문토기·고산리식 민무늬 토기 등 1천여 점, 석촉·찌르개·긁개·홈날·뚜르개·세석기 등 총 10만여 점에 이르는 출토물을 수집했다. 그 유물 본포 범위만 보아도 15만㎡에 이르는 것으로, 매우 큰 집단이 거주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신석기 시대 이후의 유적은 제주 고산리 유적 외에도 제주도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제주시에는 용담동 유적을 위시하여 삼양동 유적, 외도동 유적, 오라동 유적, 도남동 유적 등 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유적은 대체로 BC 7,000년경부터 BC 1세기에 이르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에 걸친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유적의 발견으로 보아 제주도에는 제주시를 중심으로 제주도 전역에 걸쳐 선사인들이 거주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집단 유적 상태를 보면 신석기 시대에는 소수 집단이 흩어져 거주하던 것이 청동기 시대 이후로 오면서 대거 집단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정착 문화가 발달하면서 집단생활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빙하기가 지나 날씨가 따뜻해지고 침엽수립에서 낙엽활엽수림로 식생이 변화하였다. 1만년∼5천년 전에는 습한 기후로 참나무속의 온대활엽수림이 번성하였고, 3천년∼2천년 전 부터는 지금의 제주기후와 비슷해져 다양한 온대활엽수림이 번성하였다. 제주의 신석기인들은 평탄한 지역의 야외 집터나 동굴 또는 바위그늘에서 거주하였다. 또한 변화하는 기후와 섬이라는 환경속에 산과 바다를 중심으로 동물사냥, 낚시와 조개잡이, 식물채집을 하며 살았다. 한편 제주가 완전한 섬으로 분리된 이후에도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신석기 문화가 전래되었다. 제주지역 신석기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색이 강한 제주의 토기문화를 이룩해 나갔다.

제주의 넓은 들판과 바다는 신석기 사람들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일찍부터 화살과 창 등의 수렵도구로 사냥하였으며 갈돌, 갈판을 사용하여 열매를 가공하였다. 또한 낚시도구와 해산물 채취도구를 활용하여 해산물을 포획·채취하여 섭취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에서 확인되는 전복, 조개, 능성어, 도미 등 어패류 흔적들은 신석기 후기에 적극적으로 바다자원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제주의 신석기 시대에 대한 접근을 시작 할 때 정착생활이 시작되어 농경과 가축 사육 등 제주에서의 농경의 시작점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주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농업활동에 대한 흔적들은 찾을 수 없었다. 신석기 시대의 제주는 넓은 들판에서 동물 사냥과 열매채취, 더군다나 4면의 바다로 인한 어로 포획, 해산물 채취 등 풍부한 먹거리와 함께 열악한 농경의 여건으로 농업의 도입은 한반도 육지보다 늦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으로 정리해본다.

※ 참고자료: 이영권(2004), <제주역사기행>’;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한스외르크퀴스터(송소민 반역, 2016), <곡믈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본문.jpg
▲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http://www.headlinejeju.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돈 sdlee3000@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