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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농업과 제주의 사회상

이성돈 sdlee3000@korea.kr      승인 2019.09.12 06:53:00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8 )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조선 전기는 전국에 걸쳐 중앙 집권 체제가 성리학적 정치사상에 의해 강력하게 구축되던 시기이다. 특히 조선 전기는 체제의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 졌으며 그러한 정책적 필요성에 따라 제주도에도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이 갖추어지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통해 제주도에서는 지방 행정 조직이 정비되고 공납제도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국가교육 형식이 확충되었다. 이 시기 부터 제주도 특유의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진 각종 건축물, 사적지, 각종 기록물과 같은 많은 유형 문화재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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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902호 제주향교(왼쪽), 사적 380호 제주목관아 복원모습

지방 행정 조직 정비와 관련하여 삼읍이 설치되었는데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수령으로 제주목에는 목사(정3품),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특히 제주목에는 제주 목사의 부관에 해당하는 판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관권과 토착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나면서 중앙 정부는 토관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다. 그에 따른 지방관 제도가 운영하는가 하면 제주도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토관직이 병행되었다. 공납제도로서는 말이 대표적이었으며 귤이나 각종 토산물의 진상과 함께 전제(田制)가 시행되었다. 교육과 관련하여 향교와 서원이 설립되었고 이에 적절한 인재 등용책이 이루어졌는데 제주도의 지역적‧역사적 특수성이 고려되어 과거제도가 병행되었다.

조선조의 제주도라는 특수한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던 중앙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출륙 억제 정책과 유배 정책을 들 수 있다. 출륙 억제 정책은 난민들의 도외출륙을 방지함으로써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고자 했던 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섬 공동체의 강화라는 측면과 함께 대외교류의 억제라는 부작용으로 작용하였다. 

유배 정책은 조선 전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조선시대 제주도는 대표적인 유배지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영향으로 많은 유배인들이 제주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독특한 유배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전기의 조선 개국에 따른 반대세력, 왕자의 난을 비롯한 각종 사화가 발생하였는데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이런 가운데에서 제주도에도 많은 명망있는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중앙에서도 활약이 컸다. 또한 유배 정책과 관련되어 새로운 입도조들이 제주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에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30명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며 청주 한씨, 김해 김씨, 신천 강씨, 고부 이씨 등은 조선전기에 제주에 입도하여 뿌리를 내렸다.

바다와 관련된 제주도의 특수한 입지적 조건 때문에 많은 표도인과 표류인들이 생겨났고 이것은 외부 문화 접촉의 창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제주도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그에 따른 제주도 나름대로 방어시설이 구축되었고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헌마(獻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적인 어려움과 함께 제주도 내부적으로는 폭정을 일삼는 지방관들의 횡행으로 각종 민폐가 발생하였고 나아가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심 안정에 진력하였는가 하면 각종 문화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아울러 제주의 유력층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는 회유책이 실시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인물은 고봉지(高鳳智)와 그의 아들 고득종(高得宗)이었다. 고득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2회, 일본 통신사로 1회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는 등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인으로서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제주 교육을 담당한 대표적인 관학 교육 기관으로 향교가 있었는데 1392년(태조 1)에 제주향교를 설치하였으며, 이들 향교들은 문묘를 중심으로 한 교화 기능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대표적인 사학 기관인 서원에는 국가가 공인한 사액 서원으로 귤림서원과 삼성사가 있었다.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재 양성 및 향촌민 교화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394년(태조 3)에 우마적을 작성했으며, 1404년(태종 4)에 노비적을 작성했다. 또한 1408년(태종 8)에 공부(貢賦) 정하기 등과 같은 정책 시행을 통해 제주도에 대해 강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조선 전기 제주는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 데 비해 잡역, 잡세가 많아 도민이 져야 할 역(役)이 매우 많았다. 특히 이중 도민들이 가장 꺼렸던 역으로는 소위 6고역(苦役)이라 부르는 목자역, 과원직, 선격역, 답한역, 포작역, 잠녀역이 있었다. 따라서 도민들은 이러한 고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상도 해안에 정착하기도 했다. 

13∼16세기에는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호소, 봉수와 연대를 설치·정비했다. 그러던 중 1555년(명종 10) 6월에 제주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60여 척의 선박의 왜구들이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 을묘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에 제주에서는 더욱 튼튼한 방어를 위해 9진성을 설치하고, 25봉수(烽燧)와 38연대(煙臺)를 정비했다.

조선 전기 제주사에서 목장사(牧場史)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15세기 초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국영 목장인 10소장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는 의정부-병조-전라도 관찰사-제주 목사-감목관(제주 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마감-군두-군부-목자로 이어지는 마정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주도 목장에는 일반적으로 4,000∼10,000 필 내외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국영 목장의 우마를 훔쳐 팔아먹는 우마 도적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들을 색출하여 평안도로 집단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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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목장 10소장의 구역도(왼쪽), 하멜의 제주표류 모습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 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 운반, 감귤이나 말 등의 공물 운반, 과거 응시나 장사 등을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 일본, 유구국(오키나와), 안남국(베트남 북부) 등지에 표류하기도 했다. 당시 표류인들의 견문은 『표해록』으로 전해져 주변국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실례로 1477년(성종 8)에 귤 진상을 위해 한국 본토를 향해 출항했던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태풍을 만나 유구국에 표류함으로써 유구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국인의 제주 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국인들은 남동풍·남서풍이 불어오는 여름에 표착하였다. 대부분 중국, 일본, 유구국, 안남국 사람들이었으나, 네덜란드인 J. J. 벨테브레(박연, 1627), H. 하멜(1653) 등 서양인들이 표도하기도 했다.

조선전기에 제주는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에 강력하게 편입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출륙 억제 정책과 함께 대표적인 유배지 역할을 하였으며 섬의 특성으로 표류와 표착의 역사 등을 살필 수 있었다. 다음 차에는 조선 초기 조선초기의 농업의 발전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경인문화사(2015), <제주지역 목장사와 목축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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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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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 sdlee3000@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