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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농업과 권농정책, 제주에서는?

이성돈 sdlee3000@korea.kr      승인 2019.08.22 09:14:00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6)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고려시대의 농업은 목축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우경의 확대로 생산력 증대를 일으켰던 시기이다.

고려시대 농업의 핵심은 우경에 의한 심경법이 행하여지고 2년 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는데,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하였다.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벼 재배도 보급되었는데, 이암이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하여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의복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하여 보급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일반평민의 의료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는 일대변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영농 기술은 한계가 있었는데, 이것은 시비 기술이 개발은 되었으나 가축의 뒷거름을 이용한 관계로 아직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한 단계이어서 휴경 방식의 윤작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한계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 시비 기술의 발달로 극복되어 갔다.

농업을 위하여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한 전제의 개혁과 부세의 조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농업을 장려하여 농산증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아울러 토지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즉, 생산력의 증대는 토지의 면적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라의 영토를 거의 차지한 후 부단히 북방으로 면적 확장을 꾀하였고, 내부적으로는 토지 개간을 적극 권장하였다. 당시 농지 개간을 위한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데 현종 때와 광종 때에는 개간의 특전, 즉 조세와 소작료를 규정함으로써 농지 개간 의욕을 북돋워주고, 그 결과 적극적으로 산간에 농지가 개간되어 멀리서 보기에 마치 사다리와 같을 정도로까지 되었다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개간사업에는 많은 노동력과 함께 기술적인 면, 특히 농기구와 수리(水利)에서도 혁신을 요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도 각 주군(州郡)의 병기를 덜어내어 농기구를 주조하였으며,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농구가 송나라의 그것들과 대동소이하다고 한 것을 보면 농구의 대량생산과 개량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리면에 있어서 간전사업이 활발해지고 벼재배가 보급됨에 따라 매년 겪은 가뭄, 홍수 피해에 대하여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장정과 병졸을 동원하여 제방의 개축 또는 증축에 힘썼다. 이들 저수지의 대부분은 하천의 상류를 가로막아 흙과 돌로 둑을 쌓는 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때때로 늪과 못을 파서 둑을 쌓는 경우도 있었다.

권농정책의 전면적 진전에 따라 문종 때에는 각 도에 권농사(勸農使)가 파견되었고, 다음에는 이것이 강화되어 명종 때에는 안찰사·감창사(監倉使)가 그것을 겸하였으며, 이어서 충렬왕 때에는 중앙에 농무도감(農務都監)이 설치되었다. 한편으로는 종묘제(宗廟祭)에 쓰는 쌀을 바치는 기관으로 사농시(司農寺)가 있어 권농의 본령을 발휘하였다.

고려 전성기의 중농정책은 국가재정으로나 국민경제의 수입과 지출의 근원으로도 쌀과 옷감을 화폐의 대신으로 할 만큼 강행되어 지방의 고관도 권농관 겸 징세관인 격이었고 토지반급제(土地班給制)·녹봉제 및 창제(倉制)의 확립과 함께 미곡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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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사절요(왼쪽), 고려사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큰 창고의 미곡이 묵어서 붉은 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자족자급하는, 살림이 넉넉한 백성들의 다스림을 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도경』에도 각 창고에 쌓인 쌀이 굉장하여 병란과 홍수와 가뭄에도 항상 대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재배곡식에는 벼 외에 종래의 보리·밀·조·기장·수수·피·귀리·콩·팥·녹두 등이 있었고, 밭곡식은 고려 초부터 2년3작 식인 윤작법(輪作法)으로 재배되어왔으며, 채소류로는 오이·가지·무·순무·파·박 등이 많이 가꾸어져 생식 외에 조리·김치 등 가공식품으로 애용되었다고 이규보(李奎報)는 『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 말하고 있다. 

임목(林木)으로는 성종 때 각 도(道)·주(州)·현(縣)에 영을 내려 토양이 경지로서 적당하지 않을 때 뽕나무·밤나무·옻나무·닥나무 등을 심도록 장려하였고, 인종 때에는 이러한 나무들을 다른 과일나무들과 함께 권장하였는데, 이 임목들은 잠업·칠기·제지원료로서 당시의 견직류·종이류, 기타 공예품 제조의 융성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의류는 그 원료가 주로 삼·모시 등과 명주실이었으므로 삼·모시·뽕나무의 재배가 활발하였다. 특히, 모시제품은 외국에까지 성가(聲價)를 떨쳤고, 비단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달하였다. 그 뒤 고려 말기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얻어왔다는 목화씨와 씨아[攪車]·물레 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축산, 특히 말사육은 몽골이 침입하기 시작한 12세기부터 피동적인 성황을 띠게 되었다. 몽골은 농우·군마와 그 먹이를 다른 군량과 함께 강제징발하게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동북변경 너머의 여진족의 위협도 있어 군마의 양육이 촉진된 셈이다. 농우의 징발은 때때로 농민의 분격을 사기도 하였다. 

마필의 번식은 북방에서 종마를 얻어 직접 국가에서 관리했으며, 마별초(馬別抄)라는 무반도 생겼고 교통과 체신의 구실을 맡은 역마제(驛馬制)도 있었다. 특히 목마사업은 제주도·함경도 그리고 남해의 섬지방에서 활발하였으며, 더 나아가 몽고말의 마종계획(馬種計劃)도 세웠던 것이다. 그 때의 목마사업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는 얼마 전까지도 전하여오던 말의 품종명의 수효와 제주목사(濟州牧使)·제주말총 및 그 제품의 다양함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목마사업은 너무나 국가적 통제에 치우친 나머지 말기에 와서는 국내혼란으로 인하여 관리의 해이, 목장의 황폐, 마필의 이산 등을 보게 되었다.

목축산업의 발전과 함께 신라 지증왕때 시작된 우경이 고려시대에는 농업 생산력 증대 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문종 6년(1052) 탐라의 세공귤의 정량을 100포로 영구히 정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의 세공이란 임시 과세인 별공이 아니라 해마다 정기적으로 공납하던 상공(常貢)을 일컫는 것으로 탐라에서의 감귤 세공의 유래가 상당히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때까지는 물량에 일정한 규제가 없던 것을 100포씩 바치기로 양을 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차에는 고려시대의 탐라의 농업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동시대의 제주농업의 발전상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사계절(2015),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인문화사(2009), <고려시대의 농업생산과 권농정책>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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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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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 sdlee3000@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