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 중에 아주 친한 장애인 친구가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다.
몸이 나보다 더 불편하여 휠체어를 사용하지만 불편한 몸과는 달리 성격이나 사회 생활면에서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산다.
스무 살 갓 되던 해에 내게 사회생활은 두려움 그 자체였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던 나에게 그 친구는 나를 자주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 당시 비장애인들의 장애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게 하며 “뭐든지 부딪쳐야 이겨낼 수 있는 거야”하며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주위에서는 둘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질투 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바늘과 실이랄까?
요즘에 와서 그 친구와 잦은 만남을 가졌지만, 한때 친구가 멀리 시외 지역에 있는 직장을 구해 그 쪽에 거주하면서 한 5년 동안 소식도 없고,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인협회에 들렀다가 우연하게 그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를 의지하고 살던 그 친구에게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 전화를 하려 했지만, 뭐라 딱히 해 줄 말도 없고 해서 한 번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친구에게 있어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 노동일로 가사를 이끄시던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그 친구를 업고 등교시킨 후에 일을 나가셨다고 한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모든 부모가 그렇지만,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마치 자식을 당신이 그렇게 장애를 갖게 한 업보인 양 그런 고생들을 다 감수하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였기에 큰 슬픔이 아닐 수가 없었다.
병원에 들렀을 때, 예전의 밝고 환한 표정은 하나 없었고, 초췌한 모습의 쓴웃음으로 나를 반길 때 울컥 솟아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하였다.
지금 그 친구는 불편한 몸으로 거동이 힘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자신도 불편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움 보다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 친구는 5남매 중에 막내다. 형들도 있어 형님들이 어머님을 모시겠다고 했지만 굳이 자기가 모시겠다고 고집을 부려 혼자 모시고 있다.
친구의 집에 가 보니 마치 여자처럼 깔끔하게 잘 살고 있었다. 초라하기보다는 정말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내가 지금 그 친구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 친구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할 것 같다.
그 친구는 술을 무척 좋아 한다. 나도 그 친구와의 술자리는 즐겨 한다. 부담없이 과하지 않게 마실 수 있고, 그 친구랑 술자리를 하면 내게는 얻는 것이 많다.
며칠 전, 그 친구와 저녁을 같이 하면서 술을 한 잔 했는데, 친구가 몹시 괴로워하는 것 같아 물었더니 “성복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는 걸까? 자꾸 어머님께 화도 내고 짜증을 부리게 되니 말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다.”
“네가 요즘 일도 안 되고 많이 지쳐서 그런 걸 거야. 자, 한 잔 마시고 그런 생각 훌훌 털어버려라. 요즘 같은 세상에 너 같은 효자가 어딨냐?”
“효자는 무슨, 닥치면 다 하게 된다”하며 기분 좋게 한 잔 마시고는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부모님께 했던 몹쓸 언행이나 행동들이 떠올랐다.
‘장애란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된 양, 어머님께 툭하면 왜 나를 이렇게 장애를 갖게 했냐고 대들기나 하고 짜증만 냈었지. 알고 보면 우리 부모님도 나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나를 지금까지 키우면서 더 심한 장애를 갖지 않게 하려고 갖은 고생이며 온갖 희생을 하셨는데...’
‘효도,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래, 내가 우리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건, 예전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처럼 열심히 사는 거야. ‘친구야, 힘내고 우리 열심히 살자.’
|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이성복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이성복 객원필진/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